브레히트가 고향 도시에 대해서 모순되는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17년 전시에 졸업을 한 브레히트는 뮌헨 대학 의학부에 등록을 하지만 그는 주로 아르투어 쿠처 교수의 문학 및 연극학 강의를 듣는 한편 프랑크 베데킨트(1864-1918)를 위한 추모 행사를 주최하기도 한다.
연극의 종교적, 제의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비극의 발달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오랜 기간 동안 유럽 연극의 가장 큰 특징은 희곡(텍스트) 중심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희곡적 연극’을 비판한 브레히트의 ‘서사적 연극’은 연극의 흐름을 대단히 크게 바꿔놓았지
연극’, 아니면 ‘희곡 없는 연극’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이 연극계의 중요한 화두로 대두하였다. 페터 스촌디가 진단한 “희곡의 위기”에 뒤이어 나온 새로운 텍스트형태들은 다름아닌 베르톨트 브레히트에 의한 희곡의 서사화였다. 브레히트의 극작과 연출은 서사적 내러티브를 우위에 둠으로써
Ⅰ. 서 론
브레히트 '서사극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분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독일어: Bertolt Brecht, 1898년 2월 10일 - 1956년 8월 14일)는 20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극작가, 시인, 그리고 연출가다. 주로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으며, 소격효과라는 개념을 연극연출에 사용한 것으로 유
유랑극단의 원조 <파울젠-펠텐> 극단. → <파울젠-펠텐>으로부터 여러 극단의 계보가 시작됨.
바로크 연극과는 반대로 배우중심의 극단.
극단 장을 중심으로 14~17의 배우로 구성
극단 장이 극단운영의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 궁정배우로 지정되지 않는 한 직업배우들은 천대받는 유랑민의 신분.
◎ 18세기 독일 연극의 발전
-18세기의 계몽주의와 고췌트의 연극개혁
(1) 독일의 유랑극단 - 극단의 형성과 그 계보
17세기 중반부터는 순수한 독일 유랑극단이 생겨났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극단으로는 석사 요하네스 펠텐이 이끄는 연극단이었다. 펠텐은 그때 가장 우수한 극단으로 통하던
<1> 드라마 역사 속 브레히트
1. 독일 희곡의 뿌리
1)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비극을 문학 최고의 형식으로 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주로 비극론을 전개하였다. 시학은 비극론이라고 할 만큼 많은 부분을 비극에 할애하고 있으며 특히 6~15장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비극은 관객에
연극을 어떻게 진짜 같이 느낄 수 있는지, 독일연극을 중심으로 현대극의 시작이라는 브레히트를 통해서,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현대에 미친 영향과 연극을 비롯한 현대예술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알아보도록 하자.
■ 본론
서양 연극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현대 연극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들 중 브레히트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연출가, 극작가로서 자신의 이론을 성립하고 끊임없이 실천, 연구한 사람으로 그의 ‘서사극 이론’은 현대 연극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중 서사극 연기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와 함께 현대의 연기론에
Ⅰ.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극론
1. 뒤렌마트와 희극
뒤렌마트의 희극은 인간 상황의 비유로 이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희극은 시대극으로서 Aristophanes의 희극처럼 관객에게 거리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그의 희극은 연민을 일깨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잔인한 현실을 묘사하려고 한다. 동시에 그